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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나주학생항일운동 역사강좌

작성자 : 사회적가치추진팀작성일 : 2019-03-29 16:04205






제작취지

2019년 3·1운동 100주년, 광주학생항일운동 90주년을 맞아 광주·나주지역의 역사적 의의 확산



강좌개요

강사 : 최태성(큰별쌤)

영상분량 : 10분

제작기관 :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한국인터넷진흥원,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

영상편집 :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재학생(재능기부)





안녕하세요 한국사 길잡이 큰별쌤 최태성입니다.


여러분 혹시 일찍 감정기 그 35년의 일상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많은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정말 고대고 치열한 나날이였을 겁니다.



그런데요 당시 신문들을 살펴보면 의아할 정도로 평범해 보입니다.



저는 오늘 한 기사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1929년 11월 3일자 한 신문의 사설인데요.



어떤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잠시 보시겠습니다.



이 사건은 원래 무의식한 과정을 밝아온 학생간의 돌발적인 사건이므로 그다지 중대시할 바 아니나
이것이 단순한 갑을 양교 학생의 우연한 충돌로 그치지 않고 그 사이에 미묘한 피아관이 곁들이는 고로 단순 평범해야 할 일이
분규 훤소를 가하게 되고 잘못되면 이 이상으로 사태를 악화시킬 가연성이 없지 않다.



한 언론은 중대시할 아니라던 사건 단순 평범한 일이라던 이 사건을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국의 학생들이였습니다.
일제 감정기의 전라남도 나주로 가봅니다.



1929년 10월 30일 일본인 학생을 포함한 수십 명의 학생들은 여느 때처럼 나주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로 학교에 갔습니다.


한국과 일본인 학생들은 서로 다른 칸을 이용했는데요 사건은 기차가 나주 역에 도착한 후 일어납니다.


일본인 중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이를 말리던 한국인 고등학생과 시비가 붙었죠.


이때 일본인 학생이 조센징이라고 한국을 비하하면서 격투가 벌어집니다.


한국과 일본 학생들의 충돌은 다음날 그 다음날까지 이어집니다.


여러분 나주역에서 발생한 이 사건이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발단이 됐다는거 아시나요.


일제 식민지 교육의 탄압받던 학생들이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흐릿한 사진속의 어린 학생들은 일제 경찰에 학교 침입을 반대하고 교회 차 채권과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식민지적 노예 교육제도를 철폐하라며 거리로 나서게 됩니다.


광주에서 불붙은 학생들의 항일 투쟁은 불꽃처럼 전국적으로 번졌습니다.


320개 학교에서 5만 4천여 명의 학생이 참여했죠.


이 일로 부상을 입은 한국인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들과는 달리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또한 자그마치 4640여명이 구속 되었고 580여명이 퇴학을 2330여명이 무기정학을 받았습니다.


물론 나주도 예외는 아니였습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나주역에 한일학생 충돌에서 비롯된 만큼 자신들의 일처럼 여기고 있었죠.


그래서 이 장이 서는 날을 정해서 만세를 부르고 행진했는데요.


나주에서는 어 보통학교 아 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교 초등학교 다니는 5,6학년 어린이 학생들도 집회에 참가했다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일제 저항하며 거리로 나섰던 그날 11월 3일은 현재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제정되어 그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죠.


실제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의중 하나는 요 3.1운동이후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난 항일 민족운동이였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 전국에서 민중이 일어났던 3.1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일어나기 10년 전에 그 해 그날 1919년에 3월 1일로 가보겠습니다.


1919넌 1월 고종이 사망한 후 종교계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벌일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비밀리에 제작된 독립선언서 2만장이 전국으로 배포되구요.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일제히 울려퍼집니다.


일주일 동안 이 소식을 은폐하는 일제는요 잔인하게 탄압을 했죠. 당시 일제에 체포되고 수감된 한국인은 무려 8000여명에 달합니다.


구한말 의병 투쟁으로 많은 농민이 전사했던 전남에서도 광주 목포 나주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산발적으로 펼쳤졌는데요
이 당시 전라남도는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집중된 지역이었습니다.


나주와 목포에는 일제 수탈의 상징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었죠.


일제에게 토지와 면화 쌀 등을 강탈 당한 후 일일 노동자로 전략했던 전남의 민중들은 더 이상 견딜수 없었고
3월 15일 나주 읍내에서 수백명의 민중이 만세를 외치게 됩니다.


나주에 만세운동은 청년층 특히 학생들이 주도자로 나섰다는 점이 의미가 있습니다.


10년 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발단이 나주에서 시작된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닐 지도 모르겠습니다.


1919년 봄 전국적으로 타올랐던 3.1운동은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결과만 본다면 실패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제가 주장한 것과 달리 한일병합이 한국인은 원하지 않았던 강압적 침탈이라는 진실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만세 운동이 계속 되었던 4월 11일에 3.1운동의 대의를 이어받아 수립했습니다.


당시 임시헌장의 초안을 보면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 즉 국민은 한국민족으로 한다."고 밝혔습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서러운 이들에게 대한 국민이라는 이름을 준 최초의 정부가 탄생한 것이죠.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 제헌한다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1948년 지정된 제헌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것과
1987년에 개정된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의 토대가 됩니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90주년이 되는 해 입니다.


어느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오더군요.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겠지만 다행히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무개 한 명 한 명이 역사의 주인공이었고
그들이 찾고자 했던 조국, 그 조국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음을 그리고 우리 역시 아무개의 시간을 써 나가가고 있음을 말이죠.


기억해 주십시오. 그 시간들을 그래야 역사가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