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문요약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은 한국 미디어 산업의 돌파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 인식은 없고 막연한 기대와 분석만 있을 뿐이다. 합병이 무산될 수 있는 확률이 점점 높아지는 이때 우린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개연성을 열어두고 미디어 산업을 고민해야 할 때다. 그래서 이 글은 합병 이후의 세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합병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합병이 되고 난 후에 우리 미디어 시장의 발전을 위해서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1. 냉정하지 못한 현실 인식
한해가 끝나가는 2024년 12월 30일 CJ ENM은 공정거래위원회에 티빙과 웨이브 양사 간 ‘임원 겸임 기업결합심사’를 신청했다. 일반적인 합병 심사가 아니라 ‘임원 겸임 심사’다. 2023년 12월에 티빙과 웨이브는 합병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지만, 1년 여가 지나가도록 합병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두 기업이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뿌리 깊은 불신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사건은 2019년에 있었다. 당시 CJ ENM의 티빙과 지상파 연합의 '푹(pooq)'은 넷플릭스에 대항하기 위해 합병 협상을 거의 마무리 짓고 있었다. 하지만 막판에 SK텔레콤이 지상파 측에 더 나은 조건(자사 OTT '옥수수'와의 통합 및 대규모 투자)을 제시하며 파고 들었다. 결국 지상파가 SK텔레콤의 손을 잡으면서 티빙과의 합병은 무산되었고, SK텔레콤의 옥수수와 푹이 합쳐진 ‘웨이브(Wavve)’가 탄생했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측과 손을 잡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 사건으로 CJ ENM은 '믿었던 파트너에게 배신당했다'라는 깊은 불신과 상처를 입었다. 그 뒤, 2022년 웨이브의 대주주인 SK텔레콤의 유영상 대표가 직접 방송통신위원회 간담회에서 'OTT 경쟁력 강화를 위해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이 필요하다'라고 공개적으로 제안했다.1) 시장의 위기감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나, 상처가 깊은 CJ ENM은 이를 무시했다.
그러나 채 2년도 되지 않아 두 사업자는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수천억 원에 달하는 누적 적자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합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 결국 두 기업은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2024년 12월, 양사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임원 겸임 심사’를 공식 신청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시장 독과점에 대한 우려 속에서 진행된 심사 끝에, 2025년 6월 공정위는 '조건부 승인' 결정을 내렸다.3) 핵심 조건은 합병 후 소비자 피해를 막기 위해 2026년 말까지 현행 요금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합병 심사가 아니라 ‘임원 겸임 심사’였다는 점이다. 시장은 이를 분별하지 못했다. 공정위의 조건부 승인 결정이 내려지자, 언론이나 정책 당국자, 혹은 시장을 바라보는 이들의 대부분의 눈길은 합병 이후로 향했다. 둘의 가입자를 합치면 넷플릭스를 능가하기 때문에 충분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이제 국내에서 합쳤으니, 글로벌 시장으로 가야 되지 않겠냐는 다분히 희망 섞인 바람까지 다양한 희망 회로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임원 겸임 심사’로는 합병을 할 수 없기에 그래서 합병 자체가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시장은 현재의 불안을 감지할 정도의 능력도 판단도 하지 못한 채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둥 미래의 일에 감놔라 배놔라 하기만 했다.
그 사이에 넷플릭스는 《오징어 게임》 시즌3과 소위 한류 역사를 새롭게 쓰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를 스트리밍했다. 《오징어 게임》은 전작 대비 혹평 일색이었지만, 무플보다는 악플이라는 말처럼 또 한번의 역사를 써 내려갔고, 《케데헌》은 K팝을 단숨에 주류 시장으로 올려놓는 시대적 대세감을 만들어 냈다.4) 빌보드에만 올라간 곡이 무려 8곡이다.5) 또 한 번 우리는 이런 말을 했었다, “역사상 이런 적은 없었다.”라고.

그러나 《오징어 게임》과 《케데헌》의 성공과는 별개로 한국 영상산업은 아직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물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국의 미디어 사업자들은 새로운 탈출구를 찾을 수 있는 작은 시도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기는 하다. CJ ENM과 스튜디오드래곤은 《내 남편과 결혼해줘》를 리메이크가 아니라 일본 현지에서 직접 아마존 오리지널로 제작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일본판 《내남결》이 1위, 한국판 《내남결》이 2위를 기록했다. 이런 식이라면 향후 한국에서 제작해서 일정 정도 성과를 거둔 작품은 국가별로 직접 제작해하는 소위 IP 미러링 작품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6)

그러나 이런 작은 시도가 일상이 되어 본격적인 결실을 보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 『애프터 넷플릭스』(21세기북스)에서 언급한 국내 시장의 폐허는 여전하다. 디즈니 플러스는 이미 국내 시장에서 주도권을 잃은 지 오래다. 넷플릭스의 영업 이익률은 30%를 넘겼지만7), 한국 투자 규모는 늘지 않았다. 국내 사업자는 영업이익은 고사하고 매출 자체가 줄어 들고 있다.8) 글로벌 시장과 달리 한국의 극장 관람객 수는 전년보다도 못한 수준이고,9) 방송 시장 역시 시청률 하락과 광고 수익 감소로 힘들어하고 있다.
더구나 SBS는 넷플릭스와 제휴를 체결했다.10) 국내 대표 콘텐츠 사업자가 넷플릭스 급행열차에 올라타면서 다른 콘텐츠 사업자들도 눈치 보기를 하는 중이다.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으니,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가 필요하다. 넷플릭스만 쳐다보지 않아도 되는 그 무엇이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은 한국 미디어 산업의 돌파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 인식은 없고 막연한 기대와 분석만 있을 뿐이다. 합병이 무산될 수 있는 확률이 점점 높아지는 이때 우린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개연성을 열어두고 미디어 산업을 고민해야 할 때다. 그래서 이 글은 합병 이후의 세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합병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합병이 되고 난 후에 우리 미디어 시장의 발전을 위해서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 1) 임혜선. (2023. 7. 4). 웨이브·티빙 합병 작업 돌입…'통합OTT' 탄생하나. 아시아 경제.
- 2) 이정현. (2023. 12. 5). 티빙-웨이브, 합병 MOU 체결…완료 시 최대 '토종' OTT. 연합뉴스.
- 3) 공정위 (2025. 6. 11). 티빙-웨이브간 임원겸임 방식의 기업 결합에 대한 시정조치 부과. 보도자료.
- 4) 조영신. (2025. 7. 2). 넷플 1위 휩쓴 ‘K무당 아이돌’…김밥 먹는 그 장면의 비밀. 중앙일보.
- 5) 조영신. (2025. 7. 30). 겨울왕국 똥의 숲이 경고했다…‘렛잇고’ 제친 ‘케데헌’ 숙제. 중앙일보.
- 6) 조영신. (2025. 7. 23). K드라마 새 돈줄이 열렸다…‘내 남편과 결혼해줘’ 기적. 중앙일보.
- 7) 데이비드 임. (2025. 7. 20). 2025년 2분기 넷플릭스 매출 15조 4,000억 원... 매출 16%, 영업이익 45% 상승. 다이렉트 미디어 랩.
- 8) 심혜인. (2025. 6. 30). 방송사업 매출 2년 연속 감소…광고 수익 8% 줄어. The Korea Post.
- 9) 금준경. (2025. 7. 31). 요즘 누가 영화관 가나요? 관객 2000만 명 넘게 줄었다. 미디어 오늘.
- 10) JEONG. (2024. 12. 23). 손잡은 SBS와 넷플릭스, 토종 OTT엔 날벼락. BYTE.
2. 합병이 왜 중요한가?
5월에 있었던 방송학회 주최 세미나장에서 한 말이다, “국내 시장에서 OTT 역사는 국내 서비스의 소멸론에 가깝다”라고. 시작은 북미의 사업자와 다르지 않았다. 북미에서 신흥 세력인 넷플릭스가 등장하자, 기존 사업자들이 훌루(Hulu)를 만들고, HBO Go 등을 만들 때, 우린 기존 세력들이 푹과 티빙을 만들었고, 신흥 기술 세력인 왓챠도 있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영수증을 받았다. 데이터로 승부한다고 외친 왓챠는 기업회생 절차를 밟고 있고,11) 푹은 통신회사와 손을 잡고 웨이브로 탈바꿈 했고, 티빙은 겉모습은 같지만, 속은 CJ헬로에서 CJ ENM으로, 그리고 사모펀드와 KT 등이 주주로 있는 사업자로 탈바꿈했다. 그러는 사이 2016년에 등장한 넷플릭스는 글로벌 콘텐츠와 국내 오리지널 콘텐츠를 무기로 야금야금 시장을 먹어가더니, 지금은 모든 길은 넷플릭스로 통하는 시대가 되었다.

시장의 선택은 간결해졌다. ‘넷플릭스로 가느냐, 못 가느냐.’ 만약 이 구도가 확정된다면 1사 구도 체제가 된다. 누구는 1사 체제가 되는 게 뭐가 문제냐고 말하기도 한다. 이미 유튜브가 무료 동영상 시장을 재편했지만, 큰 문제가 없지 않냐고 한다. 그러나 무료로 제공하고 공연 등의 수익을 챙길 수 있는 음악 시장과는 달리 제공 대가를 받는 것이 전부인 넷플릭스 1사 체제는 시장에 주는 메시지의 크기가 다르다. 최소한 넷플릭스 외에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 생태계의 최소 유지를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유효 경쟁 체제를 구축할 방법을 모색한 결과가 바로 국내 OTT 사업자의 합병이다.
2-1. 사업자 관점: '규모의 경제'를 통한 생존 모색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은 개별 사업자 차원에서도 '생존'을 위한 절박한 과제다. 두 플랫폼 모두 개별적으로는 우수한 콘텐츠 자산과 제작 역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글로벌 공룡 넷플릭스와의 전면전을 치르기에는 체급의 한계가 명확했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양사의 누적 적자 규모가 약 6천억 원에 달하는 최악의 상황이었고, 2024년 내부 구조 조정 등을 통해 적자 규모를 줄이곤 있지만, 여전히 수백억 원대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12) 따라서 버틸만한 체급을 갖추기 위해서는 우선 출혈 경쟁을 종식해야 하고, 비용을 효율화해야 한다.
두 서비스는 넷플릭스가 차지하고 남은 시장을 두고 ①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경쟁을 하고, ② 영화·해외 시리즈 등 비독점 콘텐츠를 수급하며 ③ 대규모 할인 및 광고 등 마케팅 경쟁을 벌여 왔다. 초기에는 시장 내 1등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남은 시장을 두고 벌인 소모전 성격이 강했다.
국내외를 합해서 매달 수십편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공하는 넷플릭스 앞에서 매달 오리지널 한 편도 버거워서 제공하지 못하는 상태에선 ‘경쟁’이라고 말하기도 우습다. 두 서비스의 합병은 이처럼 과잉 경쟁을 멈추고, 서버 및 망 사용료, 인건비 등 중복 투자 비용을 절감해서 재정적 균형을 확보할 수 있는 첫걸음이다. 국내 시장 내 입지 강화라는 성격도 분명하다. 합병이 되면 넷플릭스를 제외하고 국내 최대 구매자로서의 시장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특히 넷플릭스가 독점하지 않는 다양한 콘텐츠를 안정적으로 수급하고 유통할 기반이 된다. 이를 통해 불필요한 국내 플랫폼 간 경쟁을 줄이고 콘텐츠 수급 비용을 합리적으로 조율할 협상력을 확보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사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기대할 수 있다.
2-2. 산업 생태계 관점: '콘텐츠 주권' 회복의 시작
합병은 개별 기업의 생존을 넘어, 국내 미디어 산업 생태계 전체의 미래가 걸린 '균형 회복'이라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넷플릭스 중심의 시장 재편은 단순히 한 기업의 성공을 넘어, 국내 영상 산업 생태계의 근간을 흔드는 구조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 1: IP 종속과 부가 사업 기회의 상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콘텐츠 주권'과 ‘통제권’의 상실이다. 넷플릭스는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는 대신, 해당 콘텐츠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지식재산권(IP)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바이아웃(Buyout)' 계약을 선호한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추가 수익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대신에 당장의 제작비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여러 곳에서 제작을 거부했던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의 선택을 받아 제작할 수 있었던 건 우리 모두의 축복이지만, 전 세계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2차 수익에 대한 보상이 없다는 점은 분명 한계였다.13) 이를 피하려면 우리에겐 대안이 있어야 한다. 넷플릭스의 전략적 선택을 무시하고 다른 곳에 콘텐츠를 제공하더라도 수지를 맞출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싫던 좋던 넷플릭스의 바이아웃 계약을 따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콘텐츠는 바이아웃 계약을 체결해서 독점력을 강화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비독점 계약으로 수급하는 경향성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넷플릭스는 IP를 독점한 콘텐츠는 15%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었다.14) 그러나 이것 역시 넷플릭스가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이후에 콘텐츠 수급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선택한 전략일 뿐이다. 이 경우 제작사 입장에서는 낮은 대가로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국내 로컬 OTT가 중요하다. 넷플릭스가 바이아웃 계약을 요구할 때, IP를 유지하면서도 최소한의 수지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대안이기도 하고, 넷플릭스가 대가를 낮추려고 할 때 거부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내 로컬 사업자의 존립은 단순히 해당 사업자의 생존을 넘는 미디어 산업의 구조적 차원의 해법이라는 명분을 확보하게 된다. 로컬 OTT와 넷플릭스 외 글로벌 OTT의 조합이 위세를 가질 수 있다면 넷플릭스가 북미 사업자와 계약하듯이 추가 수익에 대한 특약 조건도 가능할 수 있다.
문제 2: 콘텐츠 다양성의 실종과 장르의 획일화
넷플릭스 1사 체제에서는 총 제작편수의 감소와 장르 편중화가 일어날 개연성이 높다. 일단 넷플릭스의 국내 투자 금액은 원화 가치에 따라서 대략 8,500억원에서 1조 내외로 2020년 이후 변화가 없는 상황이다. 이 중에서 대략 10~15편 정도의 오리지널 드라마를 제작하고, 약간의 예능과 수급 콘텐츠로 구성되어 있다. 일단 넷플릭스 주도 시장에서 시청률 하락과 광고 수익 감소로 인해서 전반적인 제작 편수 감소는 진행 중이다. OTT 오리지널 포함 최대 150여 편까지 늘어났던 제작 편수는 현재 100편 내외로 축소되었고, 이마저도 줄어들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 편수의 감소는 필연적으로 콘텐츠 다양성의 감소로 이어진다.
여기에 넷플릭스의 선호 콘텐츠란 변수가 추가되면 다양성은 더욱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넷플릭스의 한국 콘텐츠 투자는 한국 내에서의 가입자 확보와 '동남아를 포함한 글로벌 시장에서의 가입자 확보'라는 두 개의 잣대로 결정된다. 일단 힌국 콘텐츠의 동남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은 확보된 만큼, 추가적으로 동남아시아와 남미를 제외한 유럽 등 지역에서 어느 정도의 가입자 확보 기여도가 있는지에 따라서 콘텐츠 투자 규모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현재까지는 유럽 및 북미 시장에서의 성공 확률이 낮아서 현재의 투자 금액이 증가하지 않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넷플릭스는 장르형 콘텐츠를 선호한다. 전 세계 시청자에게 직관적으로 소구할 수 있는 스릴러, 액션, 크리처물, 로맨스 코미디 장르에는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지지만, 한국 사회의 특수한 맥락을 이해해야만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는 상대적으로 외면 받는다. 국내 시장을 목표로 오리지널 콘텐츠를 수급하는 디즈니플러스가 보다 국내 현대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폭싹 속았수다》처럼 1970년대~2020년까지 관통하는 시대물에 투자할 수 있으나, 글로벌 시장에서 외면받으면 다시 투자하는 결정을 받아내기가 어렵다. 실제로 2020년~2025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를 보면 대부분 장르물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부인하긴 힘들다. 실제로 최근 국내 방송시장에서 유통되는 《아이쇼핑》 등은 애당초 OTT를 겨냥했다가 선택을 받지 못해서 국내 방송시장으로 흘러 들어간 콘텐츠다. 과거 대비 소재의 다양성이 확보된 것으로 보이지만, 1사 체제가 공고히되면 이런 류의 콘텐츠 비중이 높아질 가능성이 훨씬 높다. 결과적으로 시장에 공급되는 콘텐츠의 절대 양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넷플릭스 1사 체제는 영상 콘텐츠의 다양성을 지금보다 더 빠르게 훼손시킬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 3: 산업 기반의 붕괴와 인력 유출
드라마 제작 편수의 급감은 곧바로 영상 산업 기반의 붕괴로 이어진다.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신인 작가, 감독, 배우, 그리고 수많은 스태프다. 과거 지상파의 단막극 시리즈(《드라마 스페셜》 등)는 신인 창작자들이 자신의 재능을 선보이고 업계에 데뷔하는 중요한 등용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제작비 부담으로 단막극 편성이 대폭 축소되면서 신인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거의 사라졌다.
이는 산업의 '허리'를 담당하는 중견 인력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한정된 슬롯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소수의 스타 작가와 감독에게만 기회가 집중되고 있다. 수많은 중견 창작자와 스태프들은 일자리를 잃거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제작에 참여하는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산업의 인력 구조를 기형적으로 만들고, 기술과 노하우의 전수를 단절시켜 K-콘텐츠의 미래 경쟁력을 갉아먹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라도 1사 체제를 막을 수 있는 구조는 필요하다. 웨이브와 티빙이 각각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합병을 통해서라도 버틸 수 있어야 한다. 엄청난 투자를 기대하거나 하지 않는다. 넷플릭스의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없는 것보다는 분명한 장점이다. 강력한 국내 통합 OTT의 등장은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 제작사는 넷플릭스가 아니더라도 대규모 투자를 유치할 대안을 갖게 되어 IP 확보에 유리한 협상을 할 수 있다. 창작자 역시 '한국 시청자'를 위한 다양한 실험과 도전을 시도할 '숨통'을 틔울 수 있다. 이는 곧 국내 미디어 생태계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회복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 11) 나확진, 한주홍. (2025. 8. 6). '토종 OTT' 왓챠, 기업회생 절차 개시…"서비스는 정상운영". 연합뉴스.
- 12) 김예원. (2025. 3. 9). 티빙 지상파와 손잡고 '생존 모드', 합병 지연과 적자 부담에 '궁여지책' 선택. 비즈니스포스트.
- 13) 한현정. (2025. 6. 30). ‘오겜’ 황동혁 감독 “치아 빠지고 59kg까지…호불호 반응 이해” [인터뷰]. 매일경제.
- 14) 유영규. (2024. 5. 24). 넷플릭스 한국 작품 IP 소유 15% 미만…"유연한 계약" 강조. SBS 뉴스.
3. 합병 무산의 가능성
기대와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다. 2023년 말 두 기업이 체결했던 합병 양해 각서 이후 1년 반이 흘렀다. 임원 겸임 승인 발표가 난지도 2달이 지나간다. 그러나 여전히 다음 순서는 오리무중이다. 서로가 그렇게 다급하게 합의하고 결과를 받았다면, 신속히 움직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데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 ‘주주 간 동의’라는 마지막 관문을 아직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22년 7월 14일 KT의 시즌(Seezn)과 티빙은 합병을 선언했다. 단순한 두 OTT의 결합을 넘어, CJ ENM과 KT 그룹 간의 미디어·콘텐츠 사업 전반에 걸친 전략적 제휴의 일환이었다. 합병 방식은 티빙이 시즌의 운영사인 '케이티 시즌'을 흡수 합병하는 형태였다. 이 계약에 따라, 시즌의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던 KT스튜디오 지니는 그 대가로 합병 법인인 티빙의 신주를 배정받았다. 이 거래를 통해 KT스튜디오지니는 단숨에 CJ ENM에 이어 티빙의 2대 주주(지분율 약 13.5%)로 올라서게 되었다.
모든 합병은 이해관계가 녹아 있다. KT는 약 150만 명 수준의 가입자를 보유한 시즌만으로는 글로벌 OTT와의 경쟁은커녕 국내 사업자와의 경쟁에도 밀리는 상황이었다. 콘텐츠 사업을 미래 사업으로 낙점한 상황에서 티빙과의 합병을 통해 자사 콘텐츠 제작사인 '스튜디오 지니'의 안정적이고 강력한 유통 창구를 확보하고자 하는 명백한 이유도 있었다.
티빙과 CJ ENM은 시즌의 가입자를 흡수해 단숨에 가입자 규모를 500만 명 이상으로 끌어올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넷플릭스에 대항할 국내 1위 토종 OTT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것을 목표로 했다. SKT가 웨이브(Wavve)와 번들형 상품을 구성한 것처럼 KT 무선 서비스의 번들형 상품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은 덤이었다. 이처럼 양사의 전략적 목표가 일치하면서 합병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2022년 12월 1일 통합 티빙이 공식 출범했다.
그러나 2년 반 만에 KT의 입장은 미묘하게 바뀌었다. KT는 티빙-웨이브 합병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2025년 4월 ‘KT 그룹 미디어 토크’에서는 둘의 합병이 주주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며, KT가 논의에 배제되어 있다는 점과 시즌-티빙의 합병 시 기대했던 전략적 파트너십 가치가 훼손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KT는 왜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일까?
3-1. 콘텐츠 유통 헤게모니의 상실 우려
KT가 티빙의 2대 주주로 참여한 가장 큰 목적은 '스튜디오 지니'의 안정적인 유통 창구 확보였다. KT는 2021년 스튜디오 지니를 설립하고 2023년까지 5,0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하며 콘텐츠 사업에 사활을 걸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성공으로 제작 역량을 입증했지만, ENA라는 자체 채널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티빙은 스튜디오 지니의 콘텐츠를 대중에게 선보일 가장 확실한 통로였다.
현재 KT는 티빙 내에서 2대 주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스튜디오 지니의 콘텐츠가 우선적으로 편성되고, 마케팅 지원을 받는 등 보이지 않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예를 들어, 스튜디오 지니의 신작이 공개될 때 티빙 메인 화면에 최우선으로 노출되거나, KT 통신 상품과 연계한 공동 프로모션을 통해 가입자를 유치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합병 법인이 출범하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통합 OTT의 콘텐츠 라이브러리는 CJ ENM(tvN, Mnet, OCN 등)과 지상파 2~3사(KBS, MBC, SBS)가 수십 년간 쌓아온 방대한 아카이브로 채워진다. 스튜디오 지니의 콘텐츠는 이 거대한 '콘텐츠의 바다' 속에서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을 펼쳐야 한다. CJ ENM의 《눈물의 여왕》이나 지상파의 국민 예능 프로그램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해야 하며, '우선 편성'과 같은 특혜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KT로서는 애써 키운 제작사의 콘텐츠가 제대로 빛도 보지 못하고 묻힐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를 할 수밖에 없다.
3-2. 지배구조 재편과 의사결정 영향력 축소
현재 티빙의 지분 구조는 CJ ENM이 약 48.9%로 최대 주주이며, KT스튜디오지니와 사모펀드(미디어그로쓰캐피탈)가 각각 약 13.5%로 공동 2대 주주, 그 뒤를 SLL중앙(12.7%), 네이버(10.7%) 등이 잇고 있다. KT는 2대 주주로서 이사회에 참가하며 플랫폼의 주요 의사 결정에 상당한 발언권을 가진다.
티빙이 웨이브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합병이 진행될 경우, 웨이브의 주주인 SK스퀘어(40.5%)와 지상파 3사(각 19.8%)는 합병 비율에 따라 통합 법인의 신주를 배정받게 된다. 시장에서는 합병 법인의 지분율을 CJ ENM 약 40%, SK스퀘어 약 20%, 지상파 및 기타 주주 등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KT의 지분율은 현재의 13.5%에서 5~7% 수준으로 급락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순히 숫자의 변화를 넘어, KT가 플랫폼의 미래를 결정하는 핵심 논의에서 사실상 배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사회 의석 확보는 불투명해지고, 오리지널 콘텐츠 투자 방향, 요금제 정책, 글로벌 사업 전략 등 주요 안건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커녕 목소리를 내기조차 어려워진다. 전략적 투자자에서 단순 재무적 투자자로 위상이 격하될 가능성이 크다.
3-3. 핵심 사업 IPTV와의 충돌(Cannibalization)
여기까지는 그래도 예상했던 대목이다. 그러나 최근에 합병 반대 이유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이슈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바로 KT의 핵심 사업인 IPTV와의 충돌 가능성이다. 2024년 기준, KT의 '지니 TV'는 약 88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한 국내 유료 방송 시장 1위 사업자다.
IPTV 사업은 KT 전체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캐시카우' 역할을 하고 있다. OTT 열풍 속에서도 국내에는 코드 커팅의 징후가 약하다. 저렴한 가격 덕분에 소위 무선-유선-TV로 이어지는 통신사업자의 트리플 플레이(triple play)가 여전히 유효한 사업이다. 물론 시청률 하락과 광고 수익 감소, VOD 수익 감소 등 IPTV의 플랫폼 매출이 감소하기는 하지만, 파이프 장사라고 할 수 있는 IPTV 가입자는 여전히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IPTV 3사 중에서 인당 플랫폼 매출이 작았던 KT로서는 경쟁사 대비 타격도 작았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티빙을 KT의 통신/IPTV 상품과 결합하여 가입자를 유치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통합 OTT가 출범하게 되면 IPTV 가입자 감소, 즉 코드커팅이 시작될 수 있다는 생각을 KT는 하기 시작했다. 보완이 아니라 경쟁 더 나아가서 대체재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KT 내부에서는 "우리가 동의해서 키워준 통합 OTT가 결국 우리의 핵심 사업인 IPTV 시장을 잠식하는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는 KT의 미디어 전략 전체를 뒤흔드는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질 수 있음을 의미하며, KT가 합병에 선뜻 찬성표를 던지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케이블의 몰락을 보고 있는 것처럼 IPTV도 조만간 그 전철을 밟을 것이기에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은 중요하지 않다. 이유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보다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KT가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합병이 된다고 하더라도 IPTV의 코드 커팅이 가속화되지 않는다거나, 다가올 미래인 통합 OTT에 지분을 더 늘려서 스튜디오 지니의 안정적인 유통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 더 낫다거나 하는 주장은 ‘가입자감소’라는 현실적 우려 속에 눌려 버렸다.
KT가 이런 입장을 견지한다면 결국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은 무산된다. 넷플릭스 중심 시장에서 강력한 반작용이 될 수 있는 사업자의 등장이 원초부터 좌절되는 셈이다. 앞서 원대한 꿈과 미래를 논하기에는 현실의 골이 너무 깊다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티빙이 KT를 설득한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에도 시침과 분침은 돌아간다. 주주간 동의를 받아 합병을 하더라도 다시 공정거래위원회의 합병 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우리에게 남은 골든 타임은 사라지고 있다. 그사이 지니 TV는 또 한 번 고객 만족이라는 이유를 내 걸고 컴패니언 앱을 강화하는 노력을 할 것이다. 아니라고 단정하지 말기 바란다. 옥수수와 pooq의 결합을 단행했던 SK의 SKB에서 모바일 BTV를 출시했다. KT 내부에서는 티빙 합병 무산 이후의 그림을 그릴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별도의 모바일 앱의 등장은 가능성이 높다. 그럼 시장은 실효성 없는 IPTV 모바일 앱이 존재하던 시기로 회귀하게 된다. 앞으로 가기 위한 1보 후퇴가 아니라 퇴행인 것이다.
주주 간 동의는 두 사업자가 풀어야 할 문제다. 더 많은 것을 내어주고 동의를 받던, 멱살잡이를 해서 동의를 받던 기본적으로 그들의 몫이다. 그러나 산업 생태계를 고민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단순히 그들만의 문제로 취급하기에는 찝찝하다. 두 사업자의 결합이 무산되거나 지연되면 넷플릭스 1차 체제는 완결된다.
SBS가 넷플릭스와 포괄적 제휴를 한 상황에서 한 두 개의 사업자만 더 넷플릭스와 제휴 관계를 맺는 순간에도 합병의 가치와 합병을 통해 국내 생태계를 지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실상 소멸된다. 그때는 합병이 되더라도 형식적인 성격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기에 현재 상황은 ‘그린 라이트’가 아니라 ‘데프콘 3’이다. 한가롭게 합병 이후를 논할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기업인 KT의 대승적 결단과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기업의 단기적인 이해관계를 생각하면 KT가 합병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을 탓할 순 없다. 케이블TV가 무너졌듯이 IPTV도 무너지겠지만, 유선 사업자들은 아마도 OTT와 유선 서비스의 결합 카드를 끌고 들어와 연명의 시간을 늘릴 수 있다. 그러면서 전체적인 사업 포트폴리오를 미디어 사업에서 다른 사업으로 이전할 것이다. 다른 통신사업자들은 이미 이 흐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한국 미디어 시장의 생명줄은 사라지고 넷플릭스 1인 천하가 되면, 협상력이 커진 넷플릭스는 단가를 현실화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이다.
KT의 반대로 합병이 최종 무산된다면, 이는 단순히 '거대 토종 OTT'의 탄생이 좌절되는 것을 넘어, 국내 영상 산업이 넷플릭스 외엔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 처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컬 시장과 글로벌 시장의 유통 창구가 넷플릭스로 단일화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KT의 전향적인 자세 변화, 즉 자사의 이익을 넘어 산업 생태계 전체를 조망하는 대승적 결단을 촉구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이 상황을 원만하게 조정하고 국가적 차원의 미디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와 역할이 요구된다.
4. 합병 이후의 과제
정부가 나서고 대승적 견지에서 KT가 양보해서 합병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다. 이미 기울어진 시장을 되돌리려면 기울기 이전보다 배전의 노력을 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단 대안 선택지로서 통합 OTT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최소한 넷플릭스 수준의 오리지널 제작 편수가 확보되어서 가입자 규모가 커져야 하고, 제작사들이 통합 OTT와 넷플릭스 외 글로벌/해외 로컬 OTT를 통해 최소한 제작비를 건질 수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이 구조속에서야 국내 콘텐츠의 다양성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최소 기반이 갖춰진다. 그래야 넷플릭스를 견제할 수 있고, 넷플릭스에 헐값으로 콘텐츠를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이런 최소 기반 조차도 통합 OTT의 힘만으로는 달성하기에는 버겁다는 점이다.
4-1. 통합 OTT는 재무 구조의 개선만을 목표로 해서는 안된다.
가장 먼저 직시해야 할 현실은 현재 상황에서는 합병의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일단 통합 OTT의 가입자 규모는 MAU 기준의 시장 전망치와는 차이가 크다. 티빙의 MAU는 실시간 야구 중계로 인해서 부풀려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통합 OTT의 가입자 규모를 800~1천만 내외로 추산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두 서비스가 명확히 자신들의 가입자 규모를 밝히지 않고 있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시장 내 여러 관계자들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통합 OTT의 초기 가입자 규모는 6~7백만 내외가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광고 요금제 등으로 인해서 OTT 평균 요금도 7~9천원 내외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연간 매출액은 대략 7천억 내외가 된다. 이 상황에서 매달 1편, 연간 12편 정도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공급하고, 넷플릭스와의 유효 경쟁을 위해 독점 수급 콘텐츠의 비중을 늘려야 하는 조건이라면 겨우 수지 타산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다. 수지 타산 혹은 재무적으로 성과를 거두려면 콘텐츠의 수급 비용 등을 줄여야 할텐데, 자발적으로 넷플릭스가 아니라 통합 로컬 OTT를 찾는 사업자의 수를 늘리는 것이 쉽지 않다. 앞서도 반복적으로 두 서비스의 합병이 단위 사업자의 재무 성과를 개선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영상 산업의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 될 수 있어야 한다.
4-1-1. 글로벌 유통 기능 확보
제작사가 넷플릭스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단일 플랫폼 제공만으로도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로컬 OTT에 콘텐츠를 독점적으로 제공해도 제작비 회수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글로벌 OTT와 제공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로컬 OTT와 글로벌 OTT에 제공한 총 대가의 규모가 넷플릭스에 제공한 대가보다 낮다면 로컬 OTT는 영원히 차선책일 수밖에 없다. 넷플릭스가 선택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로컬 OTT를 선택했을 때조차도 상상할 수 있는 총 대가가 최소한 제작비를 건질 수 있는 구조까지는 되어야 로컬 OTT 공급이 선택지로서 작동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합병 법인이 제작사에 합당한 로컬 수급 대가를 지급하거나 제작사로부터 '해외 판매 권한을 위임’ 받아 강력한 글로벌 유통 허브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한다. 통합 OTT를 통해 전 세계에 작품을 유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줄 때, 제작사는 넷플릭스 대신 통합 OTT와 손을 잡을 유인이 생긴다.
이 맥락에서 안정적 제작비 지원 구조 역시 다시 고민해야 한다. 넷플릭스는 수급 대가를 지급하는 반면에 국내 OTT들은 RS(Revenue Share) 형태의 구조를 띠고 있다. 통합 OTT도 넷플릭스처럼 제작비의 회수 범위를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의 지급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주어진 시장 규모를 감안하면 단일 사업자가 이를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에 적어도 로컬 OTT에 공급하는 콘텐츠의 경우 지원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IP 확보 문제가 시급할 때 콘진원은 IP를 확보하는 콘텐츠의 경우 작품당 50억 원을 지원하는 정책을 수립 지원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넷플릭스로부터 IP 회수를 하기가 어려워 실질적으로 지원을 받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이런 지원책을 로컬 OTT에 공급하는 경우로 한해서 제공할 수 있다면 제작 사업자가 제작비 회수 규모를 예측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외에 정부의 지급 보증이나 펀드 등과 연계해서 제작사가 로컬 OTT에 콘텐츠를 공급하더라도 글로벌 시장과 연계해 총 회수 금액을 예상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다음 작품으로 이어질 수 있는 최소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
글로벌 유통망과 안정적인 제작비 지원 체계가 마련되면, 비로소 통합 OTT는 넷플릭스와는 다른 길을 갈 수 있다. 즉, 차별화된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해 플랫폼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콘텐츠는 오직 통합 OTT에서만 볼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충성도 높은 가입자 기반을 확보하며 지속 가능한 성장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
4-2-2. 정부의 역할
앞서 제시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초기 투자가 불가피하다. 글로벌 유통망 구축,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선급금 지급 등은 모두 천문학적인 비용을 수반한다. 이는 합병 법인이 출범 초기에 기존의 적자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대규모 손실을 감수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미 수년 간의 적자로 재무 상태가 취약한 상황에서, 이러한 추가적인 대규모 투자는 기업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결국 이 문제는 개별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국가적 차원의 정책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나 지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 미디어 생태계의 '최소한의 안전망'을 구축하고, 글로벌 플랫폼에 대항할 수 있는 '콘텐츠 주권'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투자로 인식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정부는 '미디어·콘텐츠 산업 발전 기금' 등을 조성하여 통합 OTT의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비 일부를 지원하거나 세액 공제 혜택을 대폭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제작비의 일정 비율 이상을 투자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법인세 감면 혜택을 주거나, 글로벌 진출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이러한 지원은 통합 OTT가 초기의 재무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장기적으로는 넷플릭스와 대등하게 경쟁하며 국내 콘텐츠 산업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은 넷플릭스에 잠식된 국내 미디어 시장의 '콘텐츠 주권'을 되찾기 위한 첫걸음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 심사 승인은 단지 법적 절차의 문턱을 넘었음을 의미할 뿐, KT의 동의라는 결정적 관문이 남아있다. 모든 이해관계자가 만족할 만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합병 이후의 구체적인 실행 전략과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결합할 때, 비로소 통합 OTT는 넷플릭스의 진정한 대항마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합병은 끝이 아니라, 진짜 경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